독서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닌데, 시집은 굉장히 좋아한다. 처음에는 짧아서 좋았고, 이후부터는 함축된 표현과 단어들이 주는 그 맛에 폭 빠져버렸다. 좋은 시가 있으면 몇번을 읽고 되뇌이고 그러다보니 날씨가 좋은날이나 좋은 풍경을 보게되면 시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도 스스로 시를 많이 알거나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서, 내가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좋다고 느끼는 시를 찾는건 쉽지않았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책장에 꽂힌 책을 보다가 우연히 너무 좋은 시집을 알게 되어서 추천하려고 한다. 바로 문학동네시인선 107 이수정 시집, 나는 네 번 태어난 기억이 있다.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게 느꼈던 시 5편 중(더 많지만 추려서) 일부 구절만 적어놓으려 한다. 1. 어떤 저녁벗어둔 옷이 자세..
깊은 물도종환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깊은 물을 닮은 사람이 되고싶다. 나는 너무나 얕아 오늘도 작은일에도 마음이 소란스럽다. 깊은 물 위에 종이배 한가로이 떠다니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깊고 고요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하루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
식목제 기형도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그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 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 속에 섞여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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