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문화/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_기형도

달도시 2018. 2. 18. 17:12
반응형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젖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녔기에 나는 외로웠고, 침묵뒤에 감쳐진 모호함으로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며 정착하지 못하는 이파리로 공중 빈곳을 떠나니기만 했다. 나뭇가지 뒤에 나를 숨기고 내가 끝끝내 정착하지 못할 그 곳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반응형

'문화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깊은 물_도종환  (0) 2018.08.01
노을_기형도  (0) 2018.02.26
오래된 서적_기형도  (0) 2018.02.20
식목제_기형도  (0) 2018.02.19
10월_기형도  (0) 2018.02.18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